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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16


옛 영화, 90년대~2000년대 초의 이정재가 좋았다.
이정재의 영화를 보면 그의 분위기에 취하더라. 그 기분 좋은 느낌은 그대로 가져와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황정민도 딱 행복-바람난 가족 때의 황시다.
시간은 지나면 아쉽지만 아쉽기에 기억에 남는 법인 것 같다.
세월을 인정해야하기에, 그런 씁쓸한 마음으로 쓴 글이었다.


자성이를 처음 만난 건 늦은 여름이었다.
겨울이 긴 탓에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따뜻함이 뒤늦게 스멀스멀 등줄기의 땀으로 찾아왔을 때, 뒤늦게서야 환한 햇살을 비추며 눈 앞이 뿌옇게 보일정도로 밝은 날들이었다.

 자성이는 안경을 썼다. 글씨를 참 못썼다. 내 글씨를 보곤 닮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긴 겨울이 지나 봄이 왔듯 여름이 와 버렸을 때, 덜컥 너가 와버렸다. 눈 앞에 쨍강 비춰오는 햇살이 어색하기뿐더러 이 눈앞이 찌릿찌릿해 눈살을 찌푸리는 행위가 참 새롭다 느껴지는것처럼, 너가 왔다.

 늦은 여름처럼 늦게, 오지 않을 것 같던 여름처럼 새롭게. 너가, 왔다. 내게.

 조곤조곤한 말투로 길을 설명해주던 너가 선하다. 쨍쨍한 날씨에 걸맞지 않게 까만 민무늬 반팔을 입고있었는데, 그 탓에 더욱 하애보였었다.
서울에 온 지 얼마 안 돼 길을 모르겠단 학생들에게, 저의 얼굴을 보며 방긋방긋 짓는 귀여운 웃음이란.
 본인은 모르는지, 조곤조곤 깔끔하게 길을 설명해주고있었다. 자기 등만한 가방을 매고서, 까만 뿔태를 쓰고서.

"저기 혹시 그면, ○○카페아세요?"

 연분홍빛 입술이 다물어진다. 그는 선명한 눈을 깜빡였다. 아. 학생은 깨달은듯 고갤숙였다.
"미안, 내가 이 근방에 카페를 잘 몰라서."
너무 들떠있다 푹 꺼져서는, 기운없이 자신이 알려준 방향대로 걸어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너는 말 없이 한참 쳐다보고있었지.

"○○학원 들어가시나봐요"

 흠칫,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떨었다. 아까부터 저가 들어가야 할 건물 앞에 서가지곤 들어가지 않고 구경을 하고서 있던 찰나였다.
 너는 뿔태안경을 올려쓰며 날 보았었다.

"저도 올라가려던 찰나였는데, 같이 가죠."

 같이 올라가는 계단은 무겁지도 침침하지도 않았다. 창이 있어 그 창가로 빛이 들어와 환히 계단을 비췄었다.
 끼이이이 매미가 울었다. 올라가는 발소리들이 개울가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맑게 들렸다. 너의 팔에 매어진 너의 등만한 가방에 몇번 얼굴을 부딪힐뻔한걸 피하며 너와 가깝게 올라갔었다.

"나 사실 ○○카페알아요, 단골이거든요."

 남자는 자성을 쳐다봤다. 자성은 내려가는 안경을 다시 올려쓰며 씁, 숨이 찬지 숨을 들이마시곤 땀에 젖은 촉촉한, 쓸어 넘길 것도 없이 짧았던 머릴 넘기듯 쓸며 문을 열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지 않아 뜨겁고 숨 막히는 열기가 둘을 반겼다, 자성은 땀을 닦으며 에이컨을 켰다. 자주 온듯 능숙한 모습. 남자는 한걸음 뒤로 떨어져 그를 지켜보고있다, 에이컨 리모콘을 내려놓곤 자성은 그를 흘긋 돌아봤다.

"..아마 SNS에서 보고 찾아온걸걸요."

 자성은 슬슬 찬공기에 말라가는 촉촉한 땀을 또 한번 문지르며 안경을 올려쓰곤 걸음을 옮겼다, 문들을 열며 창문을 연다. 매미소리가 커졌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동네카페였는데.."

 그는 마지막 방의 창문까지 열고선 손을 내리곤 창밖을 쳐다봤다.
걸어가는 연인 둘, 그의 눈은 그들을 따라가다 멈췄다.

"나만 알고있던 아지트같은거였거든요,"

 그는 갑자기 등을 돌려 남자를 봤다. 자성 뒤로 슬금 걸어오던 남자는 또 흠칫 멈춰섰다.
 너한테선 시원한 복숭아냄새 비슷한 향기가 났었다.

"알려지는 것도 속상한데, 뭔가 알려주고 싶진 않았죠."

 남자는 끄덕거리며 슬쩍 자성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목 뒤를 감싸고 그것을 보고 있는 자성의 눈은 또 멈춰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창가에서 떨어져선 남자에게로 다가왔다.

"그면 시작할까요?"

 남자는 천장위의 에어컨을 쳐다보다 열린 창문을 쳐다봤다. 환기를 할거면 환기를, 에어컨을 틀거면 에어컨을.. 이라 생각하던 찰나 자성은 왜 오지않는냔듯 고갤 빼곰 내밀었다.

 눈앞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알파벳들을 따라 눈을 굴리며 인상을 쓰던 남잔 문득 제 앞에 마주보고서 앉아있는 자성을 쳐다봤다.

"저, 이만하면 닫아도 되지 않을까..요"

 자성이 고갤든다. 남자는 손을 뻗어 이미 제 옆은 닫고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러며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간다.

"정 청...정 청이라 하는데..요"

 정 청, 그는 탄식하듯 중얼이며 바쁘게 창문들을 닫았다. 삑, 그리곤 에어컨을 껐다.
 별난사람, 청은 자성을 힐긋이며 또 생각했다.

 그뒤로 자성이와는 한 2-3번 더 만나고 사겼다. 알고보니 장남에다 토익시험만점이란 무시무시한 경력을 지닌 사람이었었다.

 취직을 준비했다 지금은 연극을 준비하고있다며 토익시험봐둔거 다 쓸모없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것을 진심으로 한대칠뻔했던 날이었다.
 창문을 닫아도 여전히 우렁찬 매미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 울렸었다.
 부끄러워하며 그가 건넨 극본들은 참 묘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가끔 그가 쓴 글들처럼 묘해질때가 종종 있었다. 내가 너는 가끔 어려워진다 말하면 너는 항상 턱을 숙이며 웃곤했다, 그 모습은 누구보다도 매혹적이었고 장난많은 소년의 웃음이었다.







 자성이의 시선은 묘했다. 항상 어디서든지 극을 본다는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왜 한 곳에 멈추는지는 알게 됐지만 그래도 묘한 것은 묘한 것이었다.

 그는 종종 키스할때 날 빤히 쳐다보곤 했다. 방해가되서 하지 말라 말하긴 했지만, 푸흐흐 웃을 뿐.. 여전히 그런 짖궂은 짓을 이어했다.

 그의 행동엔 종종 연애경험이 많단 것이 묻어나곤했다. 매너가 특출나거나 리드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를 지나쳐간 사람들이 많단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거리에 너와 덩그러니 서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받곤했다.
 그는 다 감춰지지 않는 나의 사투리가 좋다 말했었다.

 자성이의 키스는 능숙하지만 불쾌하진않았다. 섬세하면서도 부드럽게, 마치 길을 알려줄 때의 그처럼. 차분했고 이상하게 안정적이다란 말이 생각나곤 했다.

 갑작스럽게 닿는 그의 입술은 따뜻했지만 가끔 내가 먼저 다가가는 키스에선 차갑곤 했다.
 옅게 나는 복숭아향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넌 나를 당황스러워하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청이 형"

 놀이공원에서 뜯어먹던 솜사탕처럼 그런 날들만 이어질것같은 날들이었다. 첫날 너가 말했던 그 카페에 가보자고 생각이 들 때쯤 너는 어느때보다 차분해져선 내 옆에 있는 날들이 생겨났다.

 그날은 밤. 새벽이었다.
 대부분 자고 갔던 내 집에서 침대가 있는 방은 그 옆에 창이 떡하니 있어, 한기가 못 들어오게끔 덮어둔 담요가 푸른 새벽빛이 들어 참 몽환스럽게 보였었다.
 그 탓엔가, 너가 참 꿈같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윗통을 깐 청의 뜨거운 상체에 기댄 채 눈을 감아 잠든 것처럼 보이던 자성이 그를 불렀다. 청도 눈을 떴다.

"...아니에요"

 그때 하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들을 말이었다.
 한결같이 올라가던 계단이 추워졌고 어느새 창 밖이 참 조용하다 느껴질때였다.

"겨울이네요."

 예고도 없이, 무작정 눈을 쏟고는 곧바로 겨울이 왔다.
  자성이는 더이상 환기시키지 않았고 에어컨 리모콘은 어딘가에 쳐박혔다. 휘터 기능도 없어 전기난로로 대신했어야 했다.

 종종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는 조곤조곤하진 못하지만 친절하고 상세히 길을 가르쳐주곤했다, 그면 어느샌가 저만치에서, 내가 처음 그를 봤었을때처럼 나를 보고있는 자성이를 발견하곤했다.

 연분홍입술이 얇게 올라가 웃고, 그의 미묘함이 조금씩 더 사랑스러워보여져갈 때쯤, 회색 목티를 입은 자성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감독님 밑에서 배우게됐다, 멀리 가게 될 것같다.'

 축하한다, 가볍게 뱉은말에 발목이 잡혀 눈 깜빡할 새에 바닥으로 푹 떨어진 기분이었다. 만난지 몇개월되지도 않았는데, 우스갯소리라고 한 말이 자성이의 얼굴을 굳게 만드는 걸 봤다.

 자성이는 사랑을 나눌때면 안경을 벗곤 했다. 선명한 눈에 깊이 빠져 나도 그 안의 색이 될 것만 같았었다. 우리 둘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를 바라보다 난 문득 과거생각을 했었다.

 매미가 또 울어주면 좋으련만, 자신들도 모르게 쏟아져 내린 눈에 모조리 얼어죽은 모양이다.

 마지막인데 우리 그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자. 썰렁하기만한 계단을 내려가다 향수처럼 스친 첫만남의 회상에 울컥 말을 뱉었더니, 너가 언제 계단을 다 내려간건지 바닥에 서 나를 미안한듯 돌아봤다.
 그 카페 문닫은지 꽤 됐어요.

"내가 너무 꽁꽁 감춰서 그런가.."

 어색하게 뱉은 말엔 어색한 미소가 같이했다.
 청은 참 멀다 느껴지는 거리를 좁히려는지 쿵쾅, 계단을 마저 내려가선 자성을 껴안았다.
 이런 낯간지러운 짓은 처음이다 생각했었다. 꽁꽁 몸을 감싼 옷들이 참 이상하게 어색하다 생각이 들었다.
 그래, 겨울이었다.





*   *   *





 어색했다, 가방이 없는 맨등은.
 자성은 기차를 기다리는동안 청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웃음을 품고서.
 청은 그를 힐끔 힐끔 쳐다볼 뿐 오래동안 그를 보진 못했다. 그러다 등을 돌린 자성은 앞만 꼿꼿이 쳐다봤다. 그제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안경도 벗고, 이런날에 자꾸 웃으며 나를 보는 너가 괴상해서.. 그뒤로 한번을 돌아봐주지 않던 자성은 이윽고 기차가 와서야 돌아섰다.

"..나 말이에요, 다른사람들한테 형 얘기 안할거에요."

왜? 쪽팔려서?

"나만 알고있고싶어요.
......그러고싶다."

 꽉 잡고있던 자성이의 손이 스륵 떨어졌다.
 아프다, 그냥 너가 떨어지는 것이 아팠다.

 짧았는데 참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아니, 마지막날에서조차도 그랬다.
 넌 한참 창문에서 나를 바라봤다.

 흐릿한 창문.... 손에 머릴 기댄 채 웃음기 없는 얼굴로, 또 멍을 때리듯이.... 자성의 시선이 청에게 멈춰있었다. 머물러있었다.

 그러나, 멀어져가자 자성의 입가가 흐릿하게 올라갔다. 청도 역시 웃었다. 손을 들어 흔들었다.
 구름이 잔뜩 껴서 햇빛이 들어오지않았다. 올해 겨울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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